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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요절암송 제22-16호 발간

R기연 Master 승인 2022.08.15 19:46 | 최종 수정 2022.08.15 19:49 의견 0

성경요절암송카드는 R기연 회원들과 크리스찬들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늘 암송하도록 기획한 것입니다

성경요절은 윤용구 선생님의 "성경요절 2500"을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윤선생님은 10여년동안 지하철역에서 출근시간에 논리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역사학적, 통계학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거리 전도대장입니다

삽화는 최덕기(14) 화가 작품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틈틈히 작품활동을 해오면서 글도 쓰고 있습니다. R기연을 위해서 기꺼이 작품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말씀 요절 해설은 특임위원장이신 김평래 목사(15)께서 매주 수고하고 계십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야고보서 2:9)


사람은 타인을 외모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첫 인상에 따라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얼굴을 고치고, 좋은 옷을 입고, 고급차를 모는 등 외모를 꾸미기에 바쁘다.

그러나 성도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서로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는 죽어야할 자리에서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차별(판단)한다는 말인가?

모든 것에 부요한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이 가난한 자, 연약한 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빌 2:6~8). 또한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명하고 있으며,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 선언하고 있다.

세상에서는 힘(돈, 권력 등)있는 자가 약자위에 군림하고 착취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처럼 높은 자가 낮은 자들을 섬기는 곳이다(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 대속물로 주려함이라). 그러므로 작은 예수들인 성도들 또한 남을 차별하지 말고, 오히려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편 13:6)


환난이 계속될 때 우리는 절망하거나 좌절하기 쉽다. 성도들조차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계셔도 그분께 버려진 것같은 느낌이 들 때는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도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불신자들은 스스로 주인되어 살기에 환난의 때에 헛된 우상말고는 부르짖을 데가 없지만, 우리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의 아버지도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야단을 치시며 매를 대기도 하신다. 마음이 아프지만 자식이 올바른 인생을 살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시다. 우리안에 있는 죄와 불신앙을 제거하기위해 때로 환난을 허락하시기도 한다는 뜻이다.

고난 중에도 주님께 부르짖다 보면 우리도 다윗처럼 주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부르짖음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우리가 존재하며 기동하는 모든 것이 그분의 은덕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행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에베소서 3:12)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생명과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막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모든 인간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죽어있는 것이다(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성도들의 죄값을 치뤄주셨으며, 그 결과 성도들은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하나님과 성도들을 막고 있던 담이 십자가로 무너져내린 것이다(엡 2:14).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고,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으며, 또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시도 존재하거나 살 수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영생이라는 상(賞)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히 11:6,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역대하 20:17)


성경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 말한다(삼상 17:47, 대하 20:15). 전쟁의 승패는 여호와께서 결정하신다는 뜻은 물론, 전쟁 자체도 여호와의 허락하에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 땅에 전쟁을 허락하는 것일까? 전쟁은 인간의 죄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 인간의 죄를 보게 하시고, 또 죄를 징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이스라엘(성도를 상징)에 허락하신 전쟁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은혜로 풍요를 누리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풍요를 즐기기에 바쁘고, 하나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우상을 의지하기 쉽다. 이럴 때 하나님은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고 부르짖게 하신다.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무섭게 몰려오자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오직 주만 바라보니이다' 고백한다(12절). 그러자 주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선지자를 보내 '너희는 가만히 서서 내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말씀하신다. 결과적으로 대적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멸절당했으며, 이스라엘은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게 된다.

성도들의 영적 전쟁 또한 이와 똑같다. 우리가 싸우고자하는 마음을 먹고, 하나님만 바라보면, 친히 싸워주시고 승리케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싸워야 하는데, 그럴 때 승리는 이미 확정된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로새서 3:21)


자녀들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맡기신 인격체이다. 그러기에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해서는 안되며, 그들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해야 한다.

한편 부모 특히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마 23:9,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그러기에 공의와 사랑의 본을 보여야 하며, 자녀가 분노하여 낙심케 해서는 안된다.

왜 자녀가 분노케 되는가? 자녀를 훈계하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방법과 표준을 고집하거나, 자녀가 잘 순종치 않는 경우 혈기와 울분으로 반응하여 악담이나 폭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자녀는 순종하기는커녕 낙심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를 훈육할 때 기도하며 주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사랑과 합당한 권위로 규율있게 행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최선을 다하되 불순종할 때에도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오래 참으며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주님께 맡겨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상황과 관계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의 원리인 사랑을 훈련하기위해 주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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